▲ 거창국제연극제 기간 수승대 모습 |
‘여름철 극한 직업’ 조명 감독의 여름 나기라는 주제를 처음 받았을 때, ‘내 직업이 극한 직업인가?’라는 생각에 조금 당황했다. ‘얘깃거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지난 몇 년간 나의 여름 작업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뜨거운 여름답게, 뜨거운 경험이 떠올랐다. 바로 2005년 극단 드림플레이와 함께 〈유령을 기다리며〉라는 공연으로 참여했던 거창국제연극제다. 거창국제연극제는 수승대 라는 계곡 옆에서 벌어지는 국제 연극제다. 낮에는 계곡에 물놀이 나온 관광객들이,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관객이 되는 것이다.
조심, 또 조심하는 방법밖에 |
▲ 사진 속 야간 조명작업은 순조로워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
아무래도 축제다 보니 셋업과 공연 스케줄은 굉장히 타이트하다. 매일 다른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공연 팀 철수와 동시에 다음 팀 셋업이 진행된다. 여름밤, 그것도 숲 속에서 하는 조명 작업은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많다. 더위와 졸음은 당연한 것이고, 작업등을 켜놓고 작업 하면 산속의 모든 벌레들과 인사를 할 수 있다. 조명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손바닥만 한 나방들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작업이 끝나면 바닥엔 수많은 벌레들이 떨어져 있다. 또한 이곳은 물가기 때문에 물안개 또는 이슬이 트러스(조명기를 설치하는 금속 봉)나 사다리에 많이 맺힌다. 트러스를 밟거나 잡고 작업을 해야 하니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많이 신경 쓴다. 특히 물기가 많아 전기가 흐를 수 있는 위험이 더 높아지므로 조명을 켜거나 전기를 써야할 때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매일 오후 8시가 되면 공연은 시작된다. 하지만 여름의 오후 8시는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다. 그러다보니 불을 켜서 포커싱(배우 동선과 무대 세트에 맞춰 조명 각도를 조정하거나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하거나 메모리(공연 장면에 맞춰 조명 진행 순서를 조명콘솔에 입력하는 작업)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공연 전날 밤(전 팀 공연이 끝난 후)부터 공연 당일 오전 해뜨기 전까지다. 당연히 조명 팀의 마음이 바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두를수록 사고가 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는 방법밖에 없다. 야간작업을 무사히 마치면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었다가 점심시간쯤 다시 극장으로 향한다.
여름의 태양은 강렬해서 조명 빛을 확인하고 싶어도 태양 빛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따라서 낮 시간은 주로 배우들이 사용한다. 무대 동선을 확인하기도 하고 장면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에 맞춰, 조명 오퍼레이터들은 오퍼실(조명을 컨트롤하는 공간)에서 약속된 장면 전환 큐 연습을 한다. 조명기의 빛을 볼 수는 없지만, 큐 타이밍과 진행 흐름을 점검하는 것이다. 한 낯 무더위에 진행되는 리허설 탓에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지친다. 더위를 쫓기 위해 잠깐 물에 들어가 보지만, 공연을 앞두고 마냥 놀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조명 오퍼실 모습. 이렇게 천막이라도 설치돼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조명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때문에 조명 팀의 손은 공연 직전에 더욱 바빠진다. 조명을 켜보고, 수정할 것을 체크한 다음, 사다리를 펴서 조명을 수정한다. 당시 공연 조명 팀은 나와 학교 후배 한 명이었다. 나는 아래에서 빛을 보고 있었고 후배는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조명을 수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리지 않는가? 깜짝 놀라 위를 보니, 그 친구가 한 손을 쫙 펴고, 반대 손으로 그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감전됐다는 것을 알았다. 사다리 위였기 때문에 우선은 어서 내려오라고 했다. 조명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감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솔직히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려온 그 후배의 손바닥은 마치 작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터져 있었다. 거뭇거뭇 탄 흔적도 보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무더위 때문에 지쳐 있던 공연 팀원들도 다들 깜짝 놀라 앰뷸런스를 불렀고, 그 후배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검사를 받게 되었다. 가장 아끼는 후배를 데리고 와서 이런 일을 당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연시간은 다가오고 공연은 해야만 했다. 후배 걱정하다 공연 중 실수라도 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려고 제 뺨을 때려가며 공연에 임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무대와 조명 모습.
그때 일 때문이었을까?
공연이 시작되고 해가 져서 밤이 되자, 무대 뒤 계곡에서 물안개가 밀고 올라왔다. 무대 위에 자연 포그(안개 효과를 내기위해 사용하는 무대장치)가 뿌려진 것이다. 일반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마침 공연 내용이 한 그루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햄릿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은 무대에 설치한 나무세트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바람 소리, 물소리, 벌레 우는 소리, 새소리들은 자연스런 음향효과가 되기도 했다. 관객의 큰 박수와 함께 공연히 무사히 마무리 됐다. 후배의 부상 덕분일까? 바짝 긴장하며 공연했던 우리 팀은 그해 연극제 대상을 받게 되었다.
▲ 조명과 무대가 물안개와 어우러진 모습.
공연이 끝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의사선생님은 후배 손에 난 상처는 전기로 인한 화상이며, 자칫 신경을 다치는 일도 있을 수 있는데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조명 연결선들의 상태가 안 좋아 진 것들이 있었다. 내가 참여한 공연이 전체 축제의 마지막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조명 설치하기 전에 한번 주변장치들의 상태를 둘러보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다.
겨울이라고 여름보다 조명 작업이 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전기를 사용하고, 높은 어두운 곳에서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늘 위험은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여름엔 평소보다 금방 지친다. 따라서 여름엔 평소보다 스스로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그 친구는 여전히 연극을 하고 있다. 당시엔 함께 조명을 했었는데, 지금은 연출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때 일 때문이었을까?
사진제공_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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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최보윤은 조명디자이너로 연극 〈배수의 고도〉, 〈템페스트〉, 〈알리바이 연대기〉, 〈히스토리 보이즈〉, 〈목란언니〉, 〈정물화〉, 〈나는 나의 아내다〉, 〈칼집속에 아버지〉 등 다수의 공연을 다양한 공간에서 작업했다. 현재 한양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이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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