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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교류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국제 교류 무대의 열혈 기획자’보다는 ‘낑낑대는 자립 음악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황당하겠지만 해외 진출이라는 구체적 계획, 목표는 없었다. 단지 내가 만든 음악을 다양한 무대에서 연주함으로써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대를 찾아야 했다. 음악인에게 무대는 끼니다.
필자가 이끌고 있는 음악 그룹 숨[suːm]은 2007년 두 연주자로 시작했다. 지금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활동도 많아졌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창작 국악을 장려하는 국내의 여러 사업, 음악 레지던시 프로그램, 신진 예술가·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문화재단 혹은 극장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큰 동력이자 자양분이 되었다.
기회란 그저 기다리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형성되는지, 그룹의 활동에 어떤 사업이 필요한지, 또 시기적으로 적절한 작업이 될 수 있는지, 항상 예의 주시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감사하게도 한국 전통음악을 베이스로 한 콘텐츠에 관해서는 많은 기회가 열려 있었고 필자는 그런 기회들에 꾸준히 도전했다.
▲ 숨[suːm](사진출처: 숨[suːm] 공식 홈페이지)
다양한 만남으로 이어진 '2011 서울아트마켓(PAMS)', '2012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
해외 무대를 향한 첫걸음은 2011년 ‘서울아트마켓(PAMS)’이었다.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이하 센터)의 ‘서울아트마켓(PAMS)’은 국내외의 우수한 공연을 선정하고, 해외 대표자를 초청해 각 팀의 쇼케이스 무대를 선보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말 그대로 아트 마켓이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 음악 시장의 관계자들에게도 숨[suːm]을 알릴 수 있는 무대를 얻기 위해 지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담 기획자는 없다. 게다가 필자의 영어 실력은 밖에 나가 돈 내고 밥 사 먹고 잠자리를 구할 정도!
생존을 위해 수없이 영문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이제는 수신인의 뛰어난 해독력으로 무리 없이 의견 교환이 된다. 한술 더 떠 가장 기본적인 엽서 크기의 홍보물을 영문으로 제작했다. 과감하게 정규 앨범을 홍보용 CD처럼 활용했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분들에게 음반을 건넸다. 쇼케이스 공연을 보고 함께 좋아한다면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음악이 최고의 홍보 수단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의 쇼케이스는 다행히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뒤로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네덜란드 ‘어스비트(Earth Beat)’ 에이전시의 제롬(Jerome Williams)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직접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팸스의 소식지를 통해서 숨[suːm]을 알게 되었다며 “숨[suːm]의 음악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해외 공연 의향이 있다면 함께하자.”라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후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2012년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에 참가해 제롬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제롬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2013 사운드오브더시티(SOTX, Sound of The Xity)’ 참가를 제안했다.
사운드오브더시티에서 초청장을 보내왔고, 아르코-팸스(ARKO-PAMS) 기금(팸스 쇼케이스에 선정되면 일 년에 한 번씩 해외 공연 혹은 페스티벌 참가 시 항공료 지원) 덕택에 공연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사운드오브더시티는 크지 않은 규모의 페스티벌형 마켓이었다. 주로 펍(pub)이나 클럽에서 쇼케이스가 열렸다. 집중력이 필요한 숨[suːm]의 음악에 맞춤하지는 않았지만 페스티벌 오프닝 무대와 세 번의 쇼케이스 무대는 관계자들에게 숨[suːm]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클럽의 작은 무대, 담배 연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삼삼오오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쇼케이스에는 ‘워멕스(WOMEX, the World Music Expo)’의 관계자가 직접 찾아왔다. 그는 엄지를 치켜들며 “Great!”를 외쳤고, 올해 워멕스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워멕스 참가를 위해 준비하게 되었다.
2013 워멕스 공식 쇼케이스 무대에 서다
▲ 2013 WOMEX ※클릭시 사진 확대
워멕스, 월드 뮤직이라는 하나의 포커스를 향해 세계에서 모여드는 음악 시장의 관계자들에게 숨[suːm]의 음악을 알릴 수 있는 큰 기회가 왔다. 2013년 워멕스는 영국 웨일스 카디프에서 열렸다. 숨[suːm]과 잠비나이, 한국 팀이 두 팀이나 선정되었다. 이례적이라 더 뜻깊었다. 이제는 좀 더 계획적으로 숨[suːm]을 프로모션할 수 있는 자료들이 필요했다. 센터의 ‘해외 마켓 지원 사업’은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전문 기획자가 아닌 필자에게 사전 간담회는 실제적인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다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센터의 여러분이 마켓 준비에 필요한 정보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수업료 내고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항공료와 호텔 비용, 홍보물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큰 메리트였다.
카디프 모터포인트 아레나에서 숨[suːm]의 주간 쇼케이스는 저마다 프로모션으로 동분서주하는 낮 시간에 열렸음에도 많은 관계자들이 객석을 채웠다. 보통은 한두 곡 듣고 다른 쇼케이스를 보기 위해 이동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공연을 숨죽여 지켜봐 주었다. 그 응원을 업고 공연 후 월드 뮤직 매거진과의 인터뷰, BBC 라디오 라이브 세션 참여 등 크고 작은 행사도 여럿 치렀다. 행사 내내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센터의 홍보 부스는 실질적인 프로모션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에게는 심적으로 든든한 후원자와 같았다.
2014년 4월 네덜란드 ‘시네마시아 페스티벌(Cinemasia Festival)’ 참가를 시작으로 7월에는 유럽월드뮤직축제포럼(EFWMF) 회원 축제인 영국 ‘워매드 찰턴 파크 페스티벌(WOMAD Charlton Park Festival)’, 벨기에 ‘스핑크스 믹스드 페스티벌(Sfinks Mixed Festival)’의 초청을 받아 센터의 ‘유럽월드뮤직축제포럼 투어 기금’으로 유럽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 2014 Sfinks Mixed Festival ※클릭시 사진 확대
10월에는 유럽 5개 도시 10개 극장 투어 공연이 있었다. 네덜란드, 벨기에, 헝가리, 이탈리아, 스웨덴의 주요 극장이 초대한 숨[suːm] 단독 공연이었다. 해외에서 두 개 이상의 공연을 연계해 진행하면 신청이 가능한 ‘센터 스테이지 코리아’ 사업의 지원이 있었다. 대부분 소극장 규모의 공연이었고 객석은 가득 찼다. 투어 직전에 나온 두 번째 음반은 공연이 끝난 뒤 준비해 간 물량이 부족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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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유럽투어 단독공연 ※클릭시 사진 확대 |
8월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 페스티벌’, 9월 ‘폴란드 크로스컬처 페스티벌’은 주최 측의 초청비 부담으로 참가했다. 모든 비용과 공연 개런티를 받으며 정식으로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은 2014년의 긍정적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북미 음악 시장을 향한 첫걸음, 2015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2015년 초에는 유럽 시장을 넘어 북미 음악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2014년 참여했던 ‘서울국제뮤직페어’(MU:CON,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에서 해외 페스티벌 및 음악 시장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쇼케이스 무대를 가졌다. 쇼케이스 무대를 갖기 전 1:1 비즈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총괄 디렉터인 제임스(James Minor)를 직접 만나 음반을 건네며 그룹의 배경과 하고 있는 음악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 내내 관심을 보였던 제임스는 쇼케이스 무대에 직접 찾아와 공연을 보았다. ‘뮤콘’ 행사가 끝난 뒤 제임스는 2015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의 1차 라인업으로 숨[suːm]을 꼭 발표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렇게 숨[suːm]은 세계 3대 음악 마켓 중 하나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2015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는 3월 13~22일,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렸다. 전 세계의 개성 있고 독창적인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인터내셔널 데이 스테이지(International Day Stage)를 시작으로, 숨[suːm]은 아방가르드 음악과 멀티미디어를 접목한 실험적인 퍼포먼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아트 콜렉티브 그룹 더 레지던츠(The Residents)의 오프닝 무대에도 초대되어 무대에 올랐다. 숨[suːm]은 페스티벌 기간 중 오스틴 컨벤션센터, 파라마운트극장, 드리스킬 빅토리아룸에서 각각 총 세 번의 공식 쇼케이스 무대에 섰다. 보통 한 팀에 한 번의 공식 쇼케이스 기회를 주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관례에 비춰 볼 때 파격이었다고 한다. 한국 팀 처음으로 펍이나 클럽이 아닌 정식 공연장 무대에도 올랐다. 이날 파라마운트극장에서의 쇼케이스는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현지 언론 매체로부터 “가장 문화적인 충격과 정신적인 자극을 준 공연”이라는 평을 받았다.
▲ 2015 SXSW ※클릭시 사진 확대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에서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3월 말, 올해로 43회를 맞은 ‘홍콩아트페스티벌’에 참가했다. 2012년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에서 쇼케이스를 관심 있게 보았던 홍콩아트페스티벌의 디렉터 소궉완(Kwok-wan So)의 초청이었다. 숨[suːm]은 ‘월드 뮤직 위켄드: 한국 음악’이라는 타이틀로 정가악회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의 경우, 센터의 한국 아티스트 해외 초청 지원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센터 스테이지 코리아’ 프로그램에 주최 측이 직접 지원 신청해 한국 팀을 초청하고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숨[suːm]의 2015년 하반기는 또 다른 도전으로 바쁠 것이다. 9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의 연장선으로 미국과 캐나다 페스티벌에 초대받았다. 10월에는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13차례의 단독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11월에는 브라질 ‘미모 페스티벌(MIMO Festival)’에 초대받았다. 유럽과 북미에 이어 남미의 음악 문화 애호가들에게도 숨[suːm]의 음악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 페스티벌 참여 차 인도네시아에 머물고 있다. 필자는 2013년 미국 국무부가 주최하고, 뱅온어캔(Bang on a Can), 파운드사운드네이션(Found Sound Nation)이 주관한 음악 프로그램 ‘원 비트(One Beat 2013)’ 펠로우로 선정되어 한 달여간 미국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그때 선정된 25명의 세계 각국 음악가들과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또 다른 음악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으로 지금 인도네시아 재즈 페스티벌에서 함께 연주하게 되었다.
음악을 중심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불러왔고, 자연스럽게 나의 음악을 더 넓은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돌아왔다. 음악을 조금씩 알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환경이 만들어졌다. 전문 기획자가 아니기에 조금은 에둘러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극한 애정과 열의와 고뇌 속에서 내 일을 직접 프로모션할 수 있다는 것은 자립 음악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이 글을 빌려 많은 예술인들이 더 큰 무대에서 한국의 문화 예술을 두루 알리고 자신의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매년 여러 사업으로 아낌없는 지원군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센터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의 예술가들이 온전히 스스로 일어나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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