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을 통해 보여주다
2015년 2월 (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주최한 ‘작은극장 큰배우’라는 워크숍에 참가하면서부터 거리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워크숍은 ‘독립예술가’라는 이름 아래 기획, 연출부터 배우까지 독립적으로 공연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당시 나는 루이스보르헤스作 『타자』라는 단편소설을 1인 거리극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스무 살의 나와 여든 살의 내가 대화하는 소설의 내용을 몽환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였는데 야외극의 특성상 무대와 조명의 도움 없이 배우의 움직임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텍스트 위주의 연극만 해왔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고 결국 고민만 남긴 채 워크숍은 끝났다. 그런데 그때 거리예술창작센터에서 주최한 ‘호주서커스-워크숍’을 한다는 글을 봤고 이를 보자마자 어쩌면 서커스라면 내 고민을 해결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지원하였다. 그렇게 서커스 워크숍은 시작되었고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단지 기능적으로 도움을 얻으려고만 생각했지 기예를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흐른 지금, 나는 봉과 줄을 타기 위해 매일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봉에 오르거나 줄 위를 걷는 기예의 움직임 자체에서 어떤 드라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내가 가진 것을 이용해 하고 싶은 이야기하기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 워크숍은 보통 한 종목의 기예를 1, 2주 정도 진행하는데 그 시간에 기예의 수준을 원하는 만큼 올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모든 수업에서 공통적으로 개인발표 시간을 가졌는데, 그 발표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우선 발표를 할 때 기예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무대 위에서 더 긴장되었는데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보통 연기를 하려 무대에 설 때 드는 긴장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원초적인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마다 강사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배운 것을 스스로 테스트해보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자신만의 것을 발견해봐라,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라, 두려움과 친구가 돼야한다”고 격려해주었고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는 나만의 퍼포먼스를 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만큼 그 긴장감을 극복했을 때 오는 희열은 엄청났다. 실제로 매 수업에서 진행된 발표를 통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 말할 줄 알게 되었다.
▲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개관공연 중인 안재현 봉앤줄 대표
서커스 창작을 하게 된 계기
2015년 12월 그해 전문가 양성과정을 마치면서 최종 발표회를 가졌다. 그동안 배운 것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되는 발표회였다. 난 내가 좋아하는 연극 독백을 하고 봉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고 다시 내려와 랩을 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는 쾌감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커스 기예의 부족한 실력을 다른 것들로 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이 부족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기예가 중심이 되는 발표를 해보고 싶었다. 다 뺐다. 시마저도 녹음해서 틀었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봉을 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와 함께 투박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정성스럽게 봉을 탔고 이 퍼포먼스는 3개월 후 정식공연인 창작서커스 <취하라(Get drunk)>의 근간이 되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무대 위에 봉과 나만 남기기로 한순간의 결정이 서커스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봉앤줄’이라는 서커스 창작단체를 만들어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시도하는 서커스 공연 <창작서커스 봉앤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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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서커스 <취하라(Get drunk)> 공연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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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 자체가 작품이 되는 퍼포먼스를 꿈꾸다
서커스전문가 양성과정 중 하나인 프랑스 연수 시절, 유럽 서커스디렉터들과의 세미나 중에 “앞으로 서커스의 흐름은 어떻게 될까?”는 나의 질문에 한 디렉터는 대답 대신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영상 속에서는 한 남자 퍼포머가 느슨한 줄 하나를 타고 있었는데 점점 줄이 하나둘 많아지더니 나중에는 열 개가 넘는 줄에 둘러싸인 채로 마치 거미줄에 얽힌 벌레처럼 그 안에서 온몸을 이용하여 줄을 타는 공연이었다. 이 퍼포머는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줄만 탔을 뿐인데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단순하게 줄타기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다른 여러 방법으로 타다 보니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해진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예를 통해 그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그런 서커스를 하고 싶다. 신체 한계의 극복은 생각의 폭을 확장시켜주고 그것은 다시 신체 한계에 도전하게 만들어주는데, 이것이 반복될 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서커스는 일단 관객이 보기에 흥미롭고 쉽고 재밌으니까 굉장히 매력적인 공연 장르로 발전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2015 하이서울 '공작소 365' 창작 서커스 거리극 <팬피터>
서커스를 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한마디
서커스에 흥미를 가지고 서커스 기예를 접목시켜서 공연을 하려는 창작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쉽게 서커스를 작업에 접목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 서커스적인 분위기 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함과 기괴함, 몽환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시작했고 한동안 그것이 서커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껍데기에 불가했기 때문이다. 정말 서커스를 접하고 싶다면 먼저 신체 트레이닝을 겪어보면서 함께 생각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실제 공연에서 기예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완브라더스'에서 2015 서울무용센터 유망예술지원사업(DOT)으로 올린 <Still Life>라는 기예 트레이닝만 4개월 넘게 해야 했었다. 서커스 공연을 하고 싶다면 기예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서커스는 머리가 아닌 몸이 조금씩 달라지는 순간 시작될 것이다.
단체소개
서커스 창작집단 ‘봉앤줄’은 서커스 기예인 봉(Chinese Pole)과 줄(Tight Wire)을 익힌 안재현에 의해 창단했다.
기본적으로 화려해 보이는 서커스 기예 이면에 인간의 나약한 부분에 주목하고 다른 예술 장르와 결합을 통한 동시대 서커스 창작을 목표로 한다.
현실이지만 상징적 존재들이 혼재된 시공간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하는데, 서커스 기예의 상징적인 존재감과 현실적인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서 이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일상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나가는 작업을 해 나갈 것이다.
‘봉앤줄’은 서커스기예와 다른 장르의 결합을 통해 무대 위 ‘헤테로토피아’ 구현을 추구한다.
필자소개
안재현은 201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전문사과정)를 수료하고 2014년까지 주로 배우로 연극 작업을 해오다가 2015년 서커스전문가 양성과정을 통해 봉(차이니즈폴)과 줄(타이트와이어)을 습득하고 기예를 중심으로 다른 장르와 접목을 시도하는 ‘봉앤줄’이라는 서커스창작단체를 만든 창작자이자 서커스 퍼포머이다.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