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휴 운영기
김노암 _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상상마당 전시감독
대안공간의 운영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대략 5가지의 요소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사람들의 관계이다. 셋째는 장소(공간)이며, 넷째는 때(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의견이 갈리는데 한 입장은 예술이념이고 다른 한 입장은 돈(자본)이다. 이 다섯 또는 여섯 가지가 대안공간의 운영과 관련된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 다섯 가지(혹은 여섯가지)가 내가 운영하는 대안공간, 더 정확히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아트스페이스 휴';의 경영에 대한 기억과 노하우를 구조하는 중요한 힘이자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나는 "대안공간은 무엇인가?" 또는 "대안공간은 아직도 유효한가?" 등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여전히 궁금하다는 얘기다. 대안공간을 실제로 운영하는 내 입장에서는 비록 그 속은 어떠하든, 굳건히 대안공간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경영자의 미덕은 내일 당장 자신의 회사를 닫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우리 회사는 괜찮고 여전히 투자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좀 과장됐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지난 시기 미술전문지는 물론 일간지, 매거진, 텔레비전, 대학신문 등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한번쯤 대안공간을 다루었다. 우리 주위에는 대안공간에 대한 기사와 원고가 차고 넘쳤다. 1999년 처음으로 대안공간이 표명된 후 주르륵 생겨났고, 우리는 좋던 싫던 대안공간을 우리 미술계의 매우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왔다.
초창기 대안공간 기획자들과 대안공간을 발판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미술가들은 그들 스스로 전시 관련 모든 일을 함께 만들어야 했다. 대안공간의 운영과 전시 프로그램을 비롯해 각종 허드렛일까지. 또 그런 일들을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었고, 또 그 일들을 한껏 즐기고 타인에게 맡기기를 꺼렸다. 최근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미술계가 확장되면서 보다 전문화되고 분업화 되어 이제는 전시의 기획부터 작품의 운송, 전시연출, 작품철수, 홍보 등등의 일들이 많은 사람들의 협업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안공간의 변치 않는 딜레마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이나 컨셉을 잡는 전시기획과 공간유지를 위한 경영의 문제가 겹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안공간들 대부분은 경영의 문제와 전시기획이 함께 얽혀 보다 복잡한 국면으로 전개되게 마련이었다. 수많은 풍문이 도는 가운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지자체의 문화재단들과 같은 공공영역과, 기업을 포함한 민간영역의 속 깊은 이해와 폭넓은 협업이 반드시 필요했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대안공간은 이제 미술계의 상투적인 일상이라 할 정도로 친숙하여 더 이상 새로움을 느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불행히도 대안공간의 이러한 빠른 상투화와 생동감의 소진은 미술계 내부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와 더 밀접하게 관련된다.
'사이'에 끼어들어 블록을 만들다
대안공간을 처음 열 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대안공간 운영자들은 부족한 자본을 한탄했다.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자본과 여건을 선용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니 공간을 빨리 알리고 자리 잡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대안공간에게는 매우 이슈가 강한 또는 기존의 미술계에서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경향이나 작가를 소개하는 등 신선한 기획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아트스페이스 휴는 그리 대단한 오프닝도 없이 매우 평범하게도 젊은 신예미술가를 소개한다는 조금은 소박한 기획과 연출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해오고 있다.
2003년 봄, 당시 대안공간 루프는 지금을 문을 닫은 쌈지스페이스의 맞은 편 내리막길(서교동 다복길)을 따라 중간지점에 이르러 작고 습한 지하공간에 있었다. 아트스페이스 휴의 런칭 전략은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루프와 쌈지가 다소 애매한 거리에 걸쳐 있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보았고 그 중간에 대안공간이 하나 더 놓이면 이 세 공간이 자연스럽게 시너지 효과와 함께 관객동선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미술잡지 기자들은 애매한 위치에 동떨어져있는 공간을 취재하기보다는 한 번에 여러 곳을 취재할 수 있는, 즉 취재의 동선이 확보된 갤러리들을 선호했다. 루프와 쌈지스페이스 사이에 아트스페이스 휴가 놓이면서 자연스러운 동선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취재가 용이해지고 또 마찬가지로 미술전문가들이나 일반 애호가들도 관객 동선이 확보된 홍대 앞을 선호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대안공간 루프 밑으로 팀프리뷰가 문을 열고, 쌈지 스페이스 옆으로 (지금은 문을 닫은) 한티갤러리라는 작은 공간이 오픈하였다. 또 얼마 후 미술포탈사이트 네오룩이 쌈지스페이스 길 건너로 이사하면서 쌈지스페이스, 아트스페이스 휴, 대안공간 루프로 이어지는 길은 2003년 여름부터 2006년까지 황금기를 맞이한다. 자고로 장사를 하려면 먼저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는 말이 딱 맞는 경우이다. 요컨대 아트스페이스 휴는 대안공간 루프와 쌈지스페이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문을 열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
시기는 어땠을까. 2002년을 전후로 이미 젊은 미술가들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관심과 요구가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 직전이었다. 국공립미술관을 비롯한 사립미술관, 상업갤러리 그리고 대안공간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젊고 참신한 미술가를 찾자는 이념에 불탔고 보조를 맞추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언론들도 가세하여 지금 돌아보면 불과 몇 년 전이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로 이후 2007년 여름까지는 우리 미술계의 풍요로운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이 시기 기획자나 작가로 활동한 사람들은 매우 흥미진진하며 유쾌한 시기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2003년 봄 대안공간을 오픈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그럼 후발 주자로서 아트스페이스 휴는 어떻게 소위 1999년 문을 연 1세대 대안공간들과 차별화를 시도해야 했는가? 또 어떤 방법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했는가? 당시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젊은 신예미술가들을 발굴한다는 큰 기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비록 국공립미술관, 사립미술관 심지어 상업갤러리 또한 동일한 목표와 실천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대안공간의 존재근거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대안공간이 젊고 참신한 신예미술가들의 인큐베이터 또는 도약대 역할을 지켜야 그러한 미술계 전체 환경이 상호 경쟁과 견제, 또는 비교를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지속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안공간이 어느새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예미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데뷔시키는 무대로서의 기능은 더더욱 유효하다. 이러한 존립 목표 또는 근거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고 개발하는 것이 대안공간 기획자들의 업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구태의연하지만 미학자 아도르노(Th. W. Adorno)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그는 자본주의가 개인들로 하여금 객관적인 사회적 추세를 단순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따라서 예술가의 작품은 소비되는 상품가치를 상실할 때, 즉 반사회적일 때 비로소 예술적 존재의의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 Bell)에 따르면 소비지향적이며 자유기업적인 사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과거와 같이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고, 자유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새로운 공공철학이 창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고도 자본주의사회이자 첨단 정보사회에서 어떻게 정당한 인간성과 그 문화와 예술을 고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고뇌하였다. 아마도 대안공간이란 이러한 서구사회의 선행적인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세계의 주변부로서 한국문화, 그 가운데 현대미술분야가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대안공간으로 상징되는 사유와 실천을 수용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과 실천의 가능성을 찾고,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의 자본주의가 고도로 심화되고 동시에 시장중심의 사회로 바뀌는데 예술문화 또한 산업으로 인식되는 현실과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위한 기획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다. 따라서 대안공간 경영의 최우선적 원칙은 대안공간이 단지 물리적 공간의 지속과 발전이 아닌 대안적 문화, 대안적 현대예술을 통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여는 것과 관련된다.
오프닝 음식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다
이런 당위적이거나 강령적인 이야기는 너무 크고 추상적이다. 한국 전시문화의 아주 작은 요소를 하나 살펴보자. 전시 오프닝 음식문화 말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사동 갤러리들의 오프닝은 전통적인 잔칫집과 다르지 않았다. 덕담이 오가고, 촌스럽지만 그럴 듯한 인사말과 소개와 인사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오프닝 음식은 대부분 떡과 김밥과 각종 마른안주와 소주와 맥주 등의 주류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근처의 동네 할아버지들이나 노숙자들도 충분히 먹고 싸갖고 갈 정도로 음식을 푸짐히 준비하는 것이 당시의 오프닝 풍경이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해외유학파가 대거 귀국하면서부터 오프닝 풍경도 바뀌게 된다. 서구의 스탠딩파티의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 또한 김밥이나 떡 대신 간단하지만 고급스런 과자류와 치즈, 와인 등을 대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고 세련된 문화로 인식되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런데 전시 오프닝이 보통은 저녁 6시인 경우가 많다 보니 초대된 관계자들이나 관객들이 저녁 공복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밥과 떡이 다시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신세대의 입맛에 맞는 퓨전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종 떡볶이나 어묵이 오프닝 음식으로 나오기도 했고, 또 추운 겨울에는 유럽의 전통음식인 끓인 와인이 마치 스프처럼 나오기도 한다. 실제 오프닝 음식으로 뜨끈한 어묵을 처음 소개한 이는 정연두 작가이고 끓인 와인은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전시를 한 이주영 작가였다.
나는 공간 오픈과 함께 대안공간은 물론 다른 어떤 미술관이나 갤러리보다도 고급스럽고 맛있으며 푸짐한 오프닝 음식을 전략적으로 준비하였다. 요리를 담는 그릇도 아주 고급스런 것으로 구입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쌈지스페이스나 루프의 전시 오프닝과 날이 겹칠 때면 관객들이나 관계자들이 거의 대부분 음식을 맛보기 위해 찾아왔고 심지어 인사동이나 강남에서 전시를 본 후 홍대 앞의 아트스페이스 휴로 오는 이들도 있었다. 기자며 비평가며 컬렉터들이며 동네 양아치까지 아트스페이스 휴의 오프닝은 매번 문전성시를 이루곤 했다. 이내 전시의 질과 상관없이(?) 서울에서 오프닝 음식이 최고로 맛있게 대접하는 공간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는 용도가 아닌 사회성을 함양하고 의사소통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과장하자면 오프닝 음식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만큼 생소한 젊은 미술가들이 보다 용이하게 미술계에 진입할 수도, 또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공간이든 예술이든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경영과 관련해 오프닝 음식이란 아주 작은 주제이다. 그런데 공간이든 예술이든 결국 사람이 그 주체인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런 사소한 요소가 사람들의 마음에 작용하는 영향을 한번쯤 생각해볼만 할 것이다. 사실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 성공적인 기획과 경영의 사례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좋은 대학이나 현대미술의 중심국에서 유학을 했다거나 인물이 좋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또는 문장력이 좋다거나 언변이 좋다거나 외국어에 능통하다거나 아는 컬렉터가 있다거나 또는 정치력 있는 후견인이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오프닝 음식이 맛있으면 금상첨화다.
어쨌든 경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제한적인 자산을 어떻게 적극적인 장점으로 선용할 것인가와 실제 작가와 작품, 매개자와 매체, 관객을 둘러싼 수많은 토론과 갈등과 합의의 과정들이 지속적이며 집중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성공적인 경영의 다섯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꼬집어 말하면 관계의 지속성 또는 신뢰가 대안공간 경영의 최고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소개 |
덧글 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