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투] 기획자와 작가와의 소통법

진심은 통한다는 그 뻔한 사실

이채영 _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공공기관에서 작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극진한 환대는 결국 진심어린 마음이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호텔과 아트센터를 왕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매 식사마다 작가의 식성을 파악해 배려하는 것, 무엇보다 공연과 전시를 위해 온 작가들에게 그들의 작품이 제대로 실현되는지 또한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1960년 10월 6일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Etude for Pianoforte)이 연주되던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에스터의 아틀리에에서는 한 동양인이 피아노를 두 대나 부수고도 모자라 존 케이지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에 거품을 내 감는 사건이 발생한다. 라 몬테 영과 존 케이지, 백남준의 곡이 연주되기로 했던 그날 콘서트에서 백남준이 벌인 연주이다.

그는 연주를 마치고 당황한 사람들을 남겨둔 채 아틀리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잠시 후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느 바에서 걸려온 백남준의 전화였다. '퍼포먼스는 끝났다'는, 그의 도발적인 이 연주는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결국 2006년 그의 장례식을 기념하는 퍼포먼스가 되었다.

전설이 된 퍼포먼스. 갑자기 가위를 들고 달려드는 백남준과 순식간에 '싹둑' 잘려진 넥타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존 케이지의 뒷자리에는 미국에서 온, 전위음악에 심취해 있던 또 다른 작곡자이자 더블 베이스 연주자인 벤 패터슨이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50년 뒤, 백남준의 생일 기념 공연에 초대된 벤 패터슨은 그때 존 케이지의 뒷목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똑똑히 봤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삽과 망치를 요청하는 예술가

필립 코너,<백남준에게 바치는 경의> 백남준아트센터,2009

필립 코너,<백남준에게 바치는 경의>
백남준아트센터,2009

벤 패터슨(1934년생)은 백남준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지 마치우나스가 작곡한 '백남준을 위한 12개의 피아노 곡'(12 Piano Compositions for Nam June Paik)을 연주하였는데, 이 공연을 위해 벤이 미리 필자에게 요구한 물품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그랜드 피아노(이 위에 벤은 페인트를 칠하고 스크래치를 낼 예정이므로 오래되고 버리기 직전인 그랜드 피아노를 찾아야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피아노를 뒤집을 수 있는 힘 센 2인, 렌치, 네온 오렌지 색 스프레이, 아주 큰 꽃병, 한 양동이의 물, 세제와 스펀지, 나무 광택제와 윤을 낼 수 있는 천.

이 정도는 아주 양호하다. 2009년에 초청했던 플럭서스 작곡가인 필립 코너(1933년생)의 공연에 필요했던 물품은 아래와 같다.

그랜드 피아노(역시 현안에 여러 물품을 넣고 현을 물건으로 뜯거나 할 예정이므로 망가져도 별 문제가 없는 피아노), 쇠붙이, 볼트, 스크류, 못, 후크, 와이어, 핀, 보석, 그릴, 스크린 천, 삽, 해머, 체인, 종, 칼, 포크, 스푼, 사다리, 파이프, 팬, 모터, 나무, 보드, 부엌 식기들, 성냥, 티켓, 카드, 노트북, 포장지, 옷, 식탁보, 온갖 야채, 과일, 장난감.

장난꾸러기 같은 플럭서스 작가들이 보낸 이메일 속 물품 리스트를 처음 보았을 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러한 도구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물건들을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귀찮은 쇼핑이 되고 만다. 하지만 플럭서스 스코어에 대한 이해, 공연에 대한 상상력을 곁들이면서 소품들을 준비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작가는 자신이 요구한 물품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기획자에게 감사를 보내게 되고, 기획자는 작가의 역사적인 공연과 그 공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가까이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기획자의 평판, 곧 기관의 명성

 
벤 패터슨, <백남준을 위한 12개의 피아노곡> 백남준아트센터, 2010
벤 패터슨, <백남준을 위한 12개의 피아노곡>
백남준아트센터, 2010
 

이렇게 해외에서 작가를 초대하고 짧은 시간 안에 국내에서 작품을 제작하거나 공연해야 하는 경우 기획자와 작가의 관계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종종 백남준과 연배 작가, 컬렉터, 큐레이터들이 초청되곤 한다. 앞서 말한 벤 페터슨뿐 아니라 플럭서스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현재에도 다수의 플럭서스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르네 블록, 백남준의 독일시절 절친했던 마리 바우어마에스터, 그리고 플럭서스 음악가 필립 코너 등이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개관 당시부터 국제적인 아트센터를 지향해온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에서는 언제나 해외에서 온 손님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학예실장이었던 토비아스 버거는 언제나 '환대'(Hospitality)와 '평판'(Reputation)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느냐에 따라 아트센터의 평판이 달려있으니 유의하라는 것이다.

빠듯한 예산으로 인해 좋은 시설의 호텔 숙박을 예약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고, 65세 이상 고령자에게도 비즈니스 좌석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공공기관에서 작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극진한 환대는 결국 진심어린 마음이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벤 패터슨을 위해 호텔과 아트센터를 왕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매 식사마다 작가의 식성을 파악해 배려하는 것, 무엇보다 공연과 전시를 위해 온 작가들에게 그들의 작품이 제대로 실현되는지 또한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계 내의 소문은 바람보다 빨라서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형성은 기관과 행사의 국제적인 명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다행히도 벤 패터슨은 불편한 다리로 경유지를 거쳐 타야했던 탑승 경로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아트센터 스태프들의 배려와 환대로 인해 매우 만족스러운 공연이 되었다는 감사 메일을 보내왔다.

큐레이터, 기획자들의 기획의도를 현실화 해주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큐레이터가 작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 자체에 전시나 행사기획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유력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로비스트처럼 비춰지는 세간의 오해들과는 달리, 이 직업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솔직한 태도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획과 관련된 주제뿐 아니라 작품의 재료, 설치, 건축, 디자인 등에 대한 기본 안목과 지식,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솔직함, 문제해결의 단초 마련

 
양아치, <이젠. 우린. 충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신세계인이다> 영상 설치+퍼포먼스, 백남준아트센터, 2010
양아치, <이젠. 우린. 충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신세계인이다>
영상 설치+퍼포먼스, 백남준아트센터, 2010
 

2010년 백남준의 글과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현대 예술 작가의 작품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던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라는 전시가 기획되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큐레이터 6인의 각양각색의 시선을 엿볼 수 있었던 이 전시를 위해 필자는 작가 '양아치'를 초대했다. 그리고 백남준의 글 가운데 '우리는 열린 회로에 살고 있다'고 선언하는 '사이버네틱 마니페스토'(Cybernetic Manifesto)를 선택했다.

사이버네틱스 사회에 중요한 것은 사이버네틱스화한 예술이 아니라 사이버네틱스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역설하는 백남준의 글을 모티브로 삼아 작가 양아치는 '열린 회로'가 아닌 '폐쇄회로', 즉 백남준아트센터의 CCTV 화면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였다. 감시와 통제의 공간인 CCTV 화면 속 공간에 작가는 댄서를 침입시켜 공간을 교란하고 간섭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전시 준비 기간을 남겨놓고 필자는 양아치 작가가 그동안 자신의 '공화국' 시리즈 전시의 오프닝에서 펼치곤 했던 CCTV 퍼포먼스를 백남준의 글과 백남준아트센터라는 공간을 모티브로 새롭게 작업할 것을 요구했다. 무리한 요구였기에 작가는 처음 난색을 표했지만, 백남준의 '사이버네틱 마니페스토'와 그 밖의 전자시대에 관한 글들을 접한 양아치는 결국 설득당하고 말았다.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컨셉의 동의가 이뤄지자 작품을 제작하는 속도는 가속이 붙었다.

주제에 맞춰 제작을 새롭게 하는 작품의 경우 기획자와 작가의 솔직한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큐레이터로서 작가와의 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솔직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일정의 압박, 예산의 문제, 그리고 전시 환경의 문제들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전제로 할 경우 문제는 해결의 가닥이 잡힌다. 특히 기획자가 얼마나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 왔는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품의 미덕과 아쉬움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소통이 가능할 때 제작은 더 탄력을 받는다.

당시 양아치의 작품은 짧은 시간 안에 안무가와 댄서를 고용하여 컨셉을 이해시키고 연습하고 조율하는 동시에 백남준아트센터의 CCTV 화면이 송출되는 지하 중앙통제실에서 2층 전시장으로 옮겨오는 전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 작업은 아트센터의 보안을 관리하는 시설팀의 협조가 함께 이뤄줘야만 했다. 작가의 요구와 행정적인 절차와의 갈등을 푸는 열쇠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획자의 신뢰이다. 기획자가 신뢰감을 가지고 작품을 위해 이것이 왜 필요한지 제대로 설명할 때 갈등은 이해로 바뀔 수 있다.

투명한 예산 제시, 불필요한 갈등 차단

마나베 다이토, 백남준아트센터, 2010

마나베 다이토, 백남준아트센터, 2010

때로는 새롭게 같이 일할 기획자나 작가를 찾을 때 역시 주변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010년 일본의 퍼포먼스를 소개하고자 주변의 몇몇 지인들에게 일본의 퍼포먼스 기획자에 대한 추천을 의뢰했다. 일본소식에 밝은 한국의 작가, 일본의 미디어아트 전문 큐레이터에게 받은 추천인의 리스트에 공통으로 겹치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일본에 가서 다수의 미팅을 가진 후 결국 선택하게 된 프로듀서는 지인들이 공통으로 추천했던 오자와 야스오였다. 해외의 작가가 아닌 기획자와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기획자가 선정한 작가와의 소통과 동시에 기획자에게도 특별한 배려와 소통을 병행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해외 프로젝트를 감행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예산의 운영이다. 해외 작가와의 소통은 아무래도 제한적일 수 있기 때문에 시작지점부터 기획자가 운영할 수 있는 예산을 투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든 적든 현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괜스레 개런티나 제작비, 작가료를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는 경우, 얼굴을 맞대고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선입견을 가지게 되고 그로인해 프로젝트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투명하게 제시하면 그쪽에서도 솔직한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며, 혹시나 예산상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상황이면 그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설득을 하거나, 작가의 요구가 예산에서 그다지 무리가 되지 않으면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퍼포먼스를 기획해온 오자와 야스오 역시 기획 초기에 예산과 작가료 등에 대한 명확한 전달을 요구했고 작가들에게도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작가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사전에 차단했다.

큐레이터란 결국 커뮤니케이터이다. 때론 깐깐한 프로모터처럼 예산을 흥정하기도 하고, 진지한 동료로서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며, 또한 완성된 작품을 관객과 소통하게 한다. 그렇기에 현장에서의 소통은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덕목을 전제로 한다. 정직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간의 오명을 쓰고 있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 실은 꼭 지녀야 할 필수조건은 이것이다.



 
이채영 필자소개
이채영은 2008년부터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로서 다수의 전시와 퍼포먼스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 5년간 미디어아트센터인 일주아트하우스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영화제 등을 기획했다. 홍익대 미학과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특히 영화이론에 대해 논문을 쓰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weekly 예술경영 NO.124_2011.04.28 정보라이선스 정보공유라이선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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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호
  • 2011-04-29 오전 6:03:19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경험담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_ _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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