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분야 법정계획을 살피며

예술과 계획,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

글 : 김규원_한국문화관광연구원 콘텐츠산업경제연구센터장

피에르 르메트르(Pierre Lemaitre)의 최신작 『화재의 색 (Couleurs de l'incendie, 2018)』을 보면, 1920년대 프랑스의 대재벌 은행가의 딸이 부친의 사망과 아들의 사고로 인해 갑자기 몰락하면서, 그러한 사고를 야기한 적들에게 20년에 걸쳐 계획적으로 복수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소설을 보면서 프랑스 대중소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장기적인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복수 혹은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같은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Au revoir là-haut, 2013)』 역시 계획적인 사기를 다루고 있다. 더욱이 복수 하면 생각나는 소설 『암굴왕(Le Comte de Monte-Cristo)』에서 알렉상드르 뒤마는 소설 역사상 가장 계획적인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를 그리고 있으며,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도 일생을 바쳐 장발장을 좇는 자비에르 경감이 등장한다. 중장기적 계획에 따른 작품의 전개와 그 계획이 들어맞는 데서 오는 쾌감은 독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어주곤 한다.

자, 이제 문화예술에서의 계획 이야기를 해보자. 2018년 5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사람이 있는 문화, 문화비전 2030’을 발간하였고 얼마 전, 2019년 6월 ‘박물관‧미술관 진흥 중장기계획(2019∼2023)’도 발표했다. 두 가지 모두 미래를 향한 중장기 계획이었지만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 내용과 주관도 다르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위상, 성격이다. 전자는 비법정계획이고 후자는 법정계획이다. 창의한국-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2004)이나 ‘사람이 있는 문화’ 모두 매우 중요한 비전계획이며 문화의 앞을 바라보는 계획이지만 법정계획은 아니다. 즉 법적 구속력이 없는 계획이다. 단, 법정계획은 국민(국회)이 제정한 법(대부분 행정법)에 근거한 계획으로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나아가 예산상으로도 뒷받침되어야 하는 계획으로 제시된다. 그럼 이제 법정계획에 대해 보다 자세히 들어가 보자. 글로 풀어내기 부드러운 분야는 아니지만, 일단 살살 들어가 보자.

법정계획 간의 차이와 다양성

법정계획에 대하여 알아보려면 해당 법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그런데 해당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법정계획도 각 법마다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실례로 그 차이를 한번 보자. 대표적으로 국가 재정 기반을 제시하는 ‘국가재정법’의 법정계획인 ‘국가재정운용계획’이 있다. 본 계획은 매년 제정하게 되어 있고 게다가 회계연도 120일 전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당해 회계연도부터 향후 5년까지를 계획 연도로 설정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올해 2019년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은 2023년의 내용까지 담아내고 있다. 나아가 계획을 국회 제출 30일 전 소관 상임위에 보고하여야 한다. 또한 ‘국토기본법’에서는 ‘국토종합계획’을 수립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국토종합(개발)계획은 계획 연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972년에서 현재까지 4차밖에 수립되지 않은 무게 있고 중요한 계획이다. 나아가 계획을 작성한 후 공청회, 국토정책위원회와 국무회의 심의 이후 대통령 승인이 필요한 계획이다.

여기서 각 법정계획의 중요한 차이는 다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1) 계획 연도
일반적으로 법정계획의 계획 연도를 보고 중기, 중장기, 장기 계획임을 알 수 있고 과거 공연법의 공연예술진흥기본계획과 같이 1년 단위로 수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연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계획 연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국토종합계획(계획 연도 10∼20년)도 있다. 문체부 관련 법정계획은 대부분 3∼5년마다 수립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에 발표된 박물관 미술관 진흥계획이나 공연예술진흥기본계획은 현재 법상으로 수립 기한이 명시되지 않고 있다.

2) 계획 수립과정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토종합계획은 일반국민대상 공청회 개최와 반영이 필수로 명시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 혹은 지방자치단체 등의 협조를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지역문화진흥법의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은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때에는 시ㆍ도지사 및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미리 협의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외에 별도로 위원회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콘텐츠산업진흥법의 ‘콘텐츠산업의 진흥에 관한 중장기기본계획’을 수립할 때는 ‘콘텐츠산업진흥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되어 있는데 위원장은 국무총리, 이하 위원은 각 부처 장관 및 민간인으로 구성하게 되어 있어 계획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공예문화산업진흥기본계획(공예문화산업진흥법)의 수립에 있어서는 공예문화산업진흥위원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명시되기도 한다. 즉 어떠한 절차를 거쳐 수렴되고 승인되고 발표하는지까지의 과정도 매우 차이가 있다.

3) 제출 및 보고 의무 여부
국회 제출 및 보고 관련: 중요한 법안은 대부분 국회 제출이나 보고가 필수로 들어가 있다. 문체부 관련 법 중 국회 보고가 제시되어 있는 경우는 ‘관광법’상 관광진흥계획으로 정기국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관광진흥계획은 대부분 시기에 맞추어 엄격하게 수립되고 제출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회 관련 제출이나 보고가 중요한 것은 국민의 대표에 대한 검증이란 점 외에도 부처가 신중을 기해 법정계획을 수립한다는 점도 있다.

4) 공통 사항
공통적인 부분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사항인데 대부분 우선 미래 환경을 검토하여 가장 적절한 ‘목표와 방향’ 혹은 비전을 제시한다. 이후 기본 방향 그리고 각 분야별 세후 사항을 제시한다. 대부분 부문별계획, 재원확보, 역할 그리고 제도개선에 대한 부분을 제시하게 되는데 1, 3, 5년 계획 등의 계획 연도의 차이에 따라 기본 방향에서 상정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기본계획과 연동하여 매년 시행계획 혹은 세부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명시한 법들도 있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종합계획에 따라 매년 문화예술교육의 지원을 위한 시행계획(이하 ‘시행계획’이라 한다)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문화 관련 법정계획

문화예술 분야의 가장 중요한 법인 ‘문화기본법’을 살펴보자. 본 법상 ‘문화진흥기본계획은’ 중앙행정기관과의 협의하에 5년마다, 그리고 시행계획은 매년 수립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외에 별도 수렴 과정 및 국회 관련 제출, 보고 등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즉 가장 중요한 법인데도 계획은 가장 간단하게 수립되도록 적혀 있다. 지역문화진흥법의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 역시 5년마다 수립되어야 한다. 단, 지자체의 자료 요구, 시도지사와 사전 협의, 지자체의 시행계획 수립의 명시 등이 제시되어 있다. 반면 예술 분야 전반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 ‘문화예술진흥법’은 계획 수립의 조항 자체가 없다. 그러나 예술 분야 내 세부 장르 법으로 볼 수 있는 공연, 공예, 서예 등의 법은 기본계획 수립이 명시되어 있다. 법정기본계획의 체계 자체가 매우 모순적이다.

결론적으로 예술 관련 법정계획은 국회 보고 및 제출의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물론 보고는 하겠지만) 중요성이 떨어지며 수립 과정에서도 의견 수렴이 제대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법체계상 종합계획 혹은 장르계획의 중복 혹은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러다 보니 장관의 취임과 함께 비법정계획의 수립에는 신경을 쓰나 정작 법정계획에는 큰 관심이 없는 실정이고 이러한 현실은 실제 기획재정부의 예산 신청에 있어 관련 근거가 미비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법정계획에 중장기적으로 명시된 사업이 아닌 새로운 사업을 들이대거나 하는 행태에서 문화예산이 처음부터 삭감의 사유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사례로 2017 국정감사 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법률로 정한 문체부 소관의 23개 중장기(3~5년) 계획 중 절반이 넘는 13개 계획이 제때 수립되지 않거나 시기가 지나 발표된 것으로 파악됐다.”라는 감사 내용이 발표1)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법정계획의 체계, 계획 연도 검토 및 정리, 의견 수렴과 승인 절차 마련, 국회 연계 등의 조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예술 정책을 가늠할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공연 기본계획

문화예술진흥법을 위한 예술종합진흥법정계획이 사실상 부재한 현 상황에, 얼마 전 발표된 법정기본계획 ‘박물관‧미술관 진흥 중장기계획’과 발표 준비 중인 ‘공연예술진흥기본계획’을 살펴보자. 우선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는 제9조에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시책수립’으로만 제시되어 있고 계획 연도도 명시되지 않고 있다. 내용도 “국ㆍ공ㆍ사립 박물관 및 미술관의 확충, 지역의 핵심 문화시설로서의 지원ㆍ육성, 학예사 양성 등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을 위한 기본 시책을 수립ㆍ시행하여야 한다.” 정도로 간단히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년 6월 발표된 중장기계획은 3차의 세미나, 정책 토론회 등과 관련 부처 의견 조율을 통해 수립 발표되었다. 우선 박물관과 미술관의 가치, 중요성, 환경 변화를 제시하고 현황 문제점을 검토한 후 이에 근거한 3대 목표(공공성, 전문성, 지속가능성)을 제시하며 16개 핵심 과제를 도출하였다. 또한 계획 연도를 5개년(2019∼2023)으로 설정하여 중장기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모든 법정계획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과제별 추진체계, 일정 등이 제시되고 있다. 단 예상 예산은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법적계획 역시 다른 계획과 동일하게 목표, 전략, 과제의 체계로 구성된다. 박물관 미술관 중장기계획을 볼 때는 이러한 구성자체가 배경 등을 고려할 때 적절한 것인지, 구성이 과제로 연결되는 논리가 합당하고 현실적이며 현장에서 필요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연예술진흥기본계획은 공연 상 수립, 시행하여야 한다고는 명시되어 있으나 계획 연도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2012년까지는 매년 작성되었는데 이후 7년 만에 준비하는 상황이다. 법상 계획에 담아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연예술인 육성·지원에 관한 사항
2. 공연기획·무대기계·무대조명·무대미술·무대음향 등과 관련된 공연예술 지원 인력의 양성 및 배치에 관한 사항
3. 공연장 등 공연시설 확충에 관한 사항
4. 체육시설·교육시설 등의 공연장 활용 및 그 지원·장려에 관한 사항
5. 공연예술의 해외진출에 관한 사항
6. 공연산업의 육성에 관한 사항


즉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중장기보다는 연간 계획에 담을 수 있는 너무나 단기적인 항목들이다. 반면 얼마 전 (2019.7.10.) 공연예술진흥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준비포럼 발제 자료집을 보면 이와는 별개로 5개년 계획으로 중장기적인 비전, 목표와 핵심 과제 중심으로 계획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자료집에서는 제도 개선을 언급하고 있어 향후 공연법상 진흥기본계획에 대한 항목도 수정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단, 현행법을 존중하여 앞의 법상 항목과 중장기 계획의 내용을 서로 연결하는 노력을 하고 있어 ‘지위와 권리보장’, ‘지원체계의 혁신’, ‘대안적 공연생태계조성’의 3대 방향하에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다만, 1년 단위 계획 중심의 법 항목과 괴리가 분명히 있어 가치, 방향 그리고 과제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올해 발표되거나 준비 중인 진흥계획과 기본계획을 계기로 문화예술계 법정계획의 현주소를 잠시 살펴보았다. 일단은 법의 체계, 법정계획의 체계화를 세우는 과정들이 합리적으로 개선되길 바란다. 그래야 전체 예술 정책의 포괄적인 중장기 계획과 그 하단의 장르별 계획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에는 민과 관의 협치가 수반되어야 할 테고, 나아가 계획을 실행하고, 또 그 실행을 평가하는 과정이 담보되었으면 한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오래된 계획이 이루어져 결실을 맺듯이, 예술계에도 매 계획주기별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나날을 기대해 본다.

1) 김병욱 “문체부 법정 중장기계획 절반 제때 안 나와”, 연합뉴스, 2017.10.13일

  • 김규원
  • 필자소개

    김규원은 현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콘텐츠산업경제연구센터장으로, 프랑스에서 지리학을 수학하고 축제에 대한 논문을 쓰다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 입사하였다. 초기에는 축제 관련 연구를 진행했고, 이후 문화도시, 문화시설 관련 다소 하드한 연구를 지속했다. 또한 전통공연예술, 지역문화에 관해 20여 년간 다양한 연구 경험을 축적하였으나 콕 집어 내놓을 전문 분야라고 내세울 것은 없는 실정이다. 단, 국악 관련 정책 연구는 운이 좋아 여러 번 하였으며 초기에 당인리, 광주아시아문화전당 관련 연구에서 사람과 인생에 대하여 많이 배운 것을 아직도 써먹고 있다.

weekly 예술경영 예술경영 430호_2019.8.22. 정보라이선스 정보공유라이선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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