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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속 영국의 공연예술산업 통해 ‘지속가능성’ 다시 읽기

글 : 이혜원_블루밍루더스 공동예술감독

대다수 프로젝트 및 기관, 극장 등이 공공기금을 통해 운영되는 영국의 공연 예술계에서 ‘ESG’는 자주 인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오히려 자본 시장에서 제시된 평가 지표로써 ESG는 현재 영국 예술계의 지속가능성 논의에서 많은 의문을 남긴다.1) 지구와 사회에 대한 책임, 모든 시민들이 문화 예술을 향유할 권리라는 ‘공적 가치’가 사적 자산인 ‘투자 가치’로 전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2) 최근 10년 간 영국의 문화 예술계는 ESG라는 자본의 언어를 떠나 지속가능성의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예술의 언어로 탐구해 왔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의 기후위기 및 팬데믹, 전쟁,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많은 예술인들이 적극적으로 전환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반영한다. 물론 영국도 공적 지원이 주를 이루는 대다수 문화 예술 공간 및 프로젝트와 웨스트엔드(West End)로 대변되는 상업적 시장 간에는 문제 인식에 괴리가 있다. 이 글은 전자의 이해 및 실천에 주목하여 공연 예술계에서 지속가능성의 의미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ESG가 던진 화두에 응답하도록 하겠다.

잉글랜드예술위원회가 2020-2030 공공기금 4대 투자 원칙 계획 추진을 위해 2019년 진행한 워크숍 이미지
(출처: Arts Council England)

지속가능성, 공공 예술 지원 ‘우선순위로 급부상’

잉글랜드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 ACE)에서는 2020년에서 2030년까지 10년 동안 주요 투자 원칙으로 포부와 우수성(Ambition & Quality), 역동성(Dynamism), 환경 책임(Environmental Responsibility), 그리고 포용성과 적합성(Inclusivity & Relevance)을 내세웠다. 이 네 가지 원칙은 작업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함, 작업의 모든 단계에 친환경적 사고를 더하는 노력, 적극적으로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소외된 목소리를 작업에 담아내고 다양성에 기여하는 정도를 공공기금 지원 과정에서 중요하게 살피겠다는 것이다. 10년 계획 전반에서 예술과 사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며 모두가 창의성을 발산하고 또 우수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평등, 다양성, 사회적 포용력, 환경, 공정한 일자리를 현재 문화 예술 지원의 주요 가치로 두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스코틀랜드(전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에서도 공통적인 방향성이 발견된다.

줄리스바이시클의 기후 창작 리더십(Creative Climate Leadership) 프로그램 (사진: Karim Shalaby)

NGO 줄리스바이시클, 예술계 ‘친환경’ 정책 가이드 역할

특히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영국 공연 예술계에서는 ESG의 세 가지 가치 중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기후 및 생태 위기에 대응하여 문화 예술계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비영리 기관 줄리스바이시클(Julie’s Bicycle) 의 역할이 컸다. 줄리스바이시클에서 개발한 ‘기후 창작 툴(Creative Climate Tools, CC Tools)’의 경우, 50개 이상의 국가, 총 5,000개가 넘는 기관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툴은 에너지 및 물 사용, 재활용, 이동 및 운송, 재료 사용 등을 점검하고 기관의 친환경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영국 외에도 다양한 지역의 공연 예술 관련 기관에서 이러한 창작 툴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데, 줄리스바이시클은 기관의 방향과 환경에 맞는 맞춤형 툴 제작을 지원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캐나다 예술위원회 지원으로 캐나다 공연 예술계의 현실에 맞는 친환경 창작 툴(Creative Green Tools Canada) 개발에 협력했다.

지속가능한 공연 창작 지침서 ‘씨어터그린북’

국내에서도 친환경 공연 제작 방법 및 기관 운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필자를 포함한 다양한 국내 공연 예술인이 속해 있는 연구 모임 ‘오늘부터[ ]’에서는 영국의 씨어터그린북(The Theatre Green Book) 중 첫 번째 편인 ‘지속가능한 제작’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2권 ‘지속가능한 건물’과 3권 ‘지속가능한 운영’ 편은 올해 중 한국어 번역이 완료될 예정이다. 씨어터그린북은 씨어터트러스트(Theatres Trust)와 영국 극장 기술자 협회(Association of British Theatre Technicians)의 의뢰로 국제 컨설턴트 업체 뷰로하폴드(Buro Happold)가 영국 공연 예술계와 협력하여 제작한 지속가능한 공연 가이드라인이자 참고서이다. 제작 과정에서 200명이 넘는 창작자 및 단체, 기관이 설문 조사에 참여했으며, 장기간의 인터뷰와 심층 모임, 문헌 조사가 진행되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자료를 사용할 수 있으며 한국어 번역본 또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3) 씨어터그린북의 기본 원칙은 시작부터 지속가능한 창작을 목표로 계획하고 소통해 나가는 것이며, 재료의 선택, 조달과 이동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영국 국립극장은 2021년부터 씨어터그린북의 기준과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2030년 탄소 중립을 성취할 계획 아래 연간 탄소 감축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올해 맨체스터에 문을 여는 팩토리인터내셔널의 새로운 공간 (사진: Factory International)

공연장에도 친환경 요소 적용

팬데믹으로 극장이 멈춘 사이 공간을 재정비하면서 극장 경영에 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가치를 적용한 사례도 있다. 런던의 어린이 극장 폴카(Polka Children’s Theatre)는 850만 파운드를 들인 재개발 공사를 마치고 2021년 9월 다시 문을 열었다. 환경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향상된 단열재와 광 발전 패널, LED 조명을 설치하고 에너지와 물 절약을 포함한 새로운 건물 관리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실제 환경영향평가에서도 매우 우수한 등급을 받았다. 이러한 전환의 범위는 공연장뿐만 아니라 극장 내 카페와 매장을 모두 포함한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기관의 장기적인 관점이 공간 전체에 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올해 맨체스터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맞추어 공간을 새롭게 오픈하는 팩토리인터내셔널(Factory International)의 경우, 건물의 지속가능성에 신경썼을 뿐 아니라 상임 직원 전체가 탄소 문해력(carbon literacy)4) 교육을 완수하도록 하고 있다. 팩토리인터내셔널은 기관 내에 지속가능성 팀이 따로 구성되어 있으며, 맨체스터 예술 지속가능성 팀(MAST)과 네트워킹을 통해 도시 내 문화 예술계와도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지속가능성 실천 ‘시간과 비용’ 감내

이처럼 영국의 많은 단체와 극장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자신들의 방향과 원칙을 널리 알리며 다양한 실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중 많은 사례들이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사회적 책임(Social)’ 및 ‘지배구조(Governance)’와 관련된 다른 가치 기준들이 함께 개선되지 않으면 전반적인 지속가능성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 씨어터그린북에서 강조하는 바도 단순히 ‘재활용을 많이 하기’가 아니라, 대화의 기준을 세우고 협업하는 소통의 과정에 있다. 지속가능성의 목표가 팀내 소수 인원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연을 통해 만나게 되는, 또 극장을 오가는 모두의 책임임을 강조하며 관객 너머의 지역 커뮤니티, 프로덕션 바깥의 협력자들을 포함하도록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결책을 탐구하고 지속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예산을 허용하는 것이다. 씨어터그린북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지속가능성에는 시간이 든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하려면 경영 구조와 시스템 안에서 일정과 예산의 유연함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씨어터그린북에서 제안하는 원칙 중 하나는 가능하면 물질적인 재료에 사용하는 예산을 줄여 나가고 대신 사람들의 시간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창작은 건강하고 윤리적인 작업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ESG 활동 ‘위장 환경주의 전락’ 경계 요망

위의 예시들과 같이 지속가능한 생태계와 사회를 위한 문화 예술계의 노력은 매우 긍정적이나, 더욱 확장된 구조의 전환과 협력 없이는 또 다른 자본주의적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공공적이며 사회적인 가치들이 자본주의 안에서 상품화되고 시장화되는 현실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ESG의 논의에서 이미 ‘그린워싱(Greenwashing)’, 즉 위장 환경주의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지속가능성’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탐구해 나가면서 협력의 태도로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지속가능한 창작 툴을 개발하는 창작자들 또한 온라인을 통해 정기적으로 모여 국제적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피드백을 함께 모으고 있다. 비록 가속되는 기후위기에 더해 현재 영국 공연 예술계는 공공기금의 대규모 예산 삭감으로 큰 재정적 위기에 처해 있으나,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향한 노력과 연대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필자 소개

    연극 창작자이자 작가, 연구자로, 현재 영국 맨체스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퍼포먼스를 통해 사람과 버섯의 관계, 지구와의 연결감을 연구한다. 공연예술 컴퍼니 블루밍루더스의 창단 멤버이자 공동예술 감독으로 2015년부터 커뮤니티, 예술, 환경을 연결하는 참여형 연극 프로젝트를 만들며 기후 정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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