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제도읽기] 영국 상주단체 제도
김병주 _ 교육연극학 박사, PRAXIS 대표
노동당 정부 주도하의 최근 12년 간 영국 문화정책은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의거한다. 예술이 특정계층의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삶의 일부로 가깝게 향유해야 하며, 예술가와 관객이 분리되기보다는 서로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관점을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함께 상호소통하고 나누는 것을 기본취지로 삼아왔다. 또한 갈수록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각화되는 영국사회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여, 문화예술이 지역과 밀접히 연계하여 보다 조화로운 사회융합의 기제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그들이 지닌 예술과 지역사회 간의 긴밀한 밀착성은 정부주도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미 오랫동안 문화행정가들과 예술가들이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 및 지역사회와의 유기적 소통을 중시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문화예술공간 운영 및 프로그램 기획에 접목해왔었기에 가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부처의 독점적 재정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와 달리 제 아무리 큰 프로젝트나 기관일지라도 예술진흥원, 지역 시의회, 정부 각 부처 및 민간기관 등을 통해 예산 지원이 균등하게 분배되는 시스템도 그러한 지속성과 자생력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자 근원이다.
다양한 기관, 기금의 균등 분배 지원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 극장인 웨스트요크셔 플레이하우스(WYP)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구 75만의 중소도시인 리즈시 시민들의 요청으로 건설된 이 극장은 연간 예산 700만 파운드의 1/3을 시의회와 예술진흥원, 민간 후원 등으로 지원받되, 나머지 2/3는 공연 수익 및 극장 부대시설 운영수익으로 자체 조달한다. 자체 제작한 질 높은 공연들을 통해 예술향유는 물론, 낮 시간과 주말에는 지역 청소년과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연계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예술과 배움, 여가와 참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지역 예술공간이다. 19년째 운영하고 있는 노인대상 예술프로그램 헤이데이즈 프로젝트(Heydays Project)는 합창,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예술장르의 배움과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공연물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0월에 공연된 <코카서스 백묵원> 같은 대작의 경우, 유명한 쉐어드 익스피리언스(Shared Experience) 극단과의 협업과 1시간 거리의 노팅엄 플레이하우스와의 협력제작은 물론, 지역의 주민 30명이 공연의 코러스로 출연한다. 150명에 이르는 극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공연-교육-지역 이라는 이 극장의 3대 핵심 키워드를 숙지하고 공감하고 있기에 원활한 소통과 유기적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영국 제2의 도시이자 광역도시인 버밍엄의 대표적 극장인 버밍엄 레퍼토리(Birmingham Rep)도 다르지 않다. 특히 인종적, 계층적으로 매우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버밍엄 시는 지역의 특성인 '문화적 다양성' 을 핵심 개념으로 삼아 다문화적 접근을 통한 사회경제적 소외 계층의 예술향유 및 접근성을 강조한다. WYP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한 지역주민들의 '평생교육'은 유아와 아동부터 청소년, 노인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극장 전체에 공유되는 버밍엄 레퍼토리의 핵심 가치이다. 지역 학교와의 연계를 통한 방문프로그램들은 물론 극장시설을 활용하는 청소년 및 성인 프로그램까지 일관된 철학을 견지한다.
대도시의 경우는 어떨까. 세계적인 대도시 런던의 서부에 자리한 리릭 해머스미드(Lyric Hammersmith)극장은 매우 젊은 예술가 및 행정스태프의 아이디어와 에너지로 급속하게 주목받는 공간이다. 런던의 상업적 공연장들과의 철저한 차별화를 통해 신작 등용문의 기회 제공 및 가족극, 청소년극 중심의 레퍼토리를 설계한다. 이곳 역시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최고의 핵심 가치로 강조한다. 지역주민을 위한 저렴한 공연가격 책정 및 각종 혜택은 물론이고, 해당지역의 일탈 청소년 및 부적응 청소년 들을 위하여 극장공간을 다양한 예술적 경험과 함께 미래의 직업훈련을 병행할 수 있는 안전지대이자 꿈을 키워내는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는 대부분의 문화예술기관과 마찬가지로 세 극장 모두가 공공지원을 받는 채리티(charity) 기관으로서 공공성 및 지역성에 대한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제도적 틀이다. 그러나 공적 재정지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인 제작공연과 효과적 운영을 통해 보다 질 높은 공연 및 프로그래밍을 위한 재원조성이 가능한 자생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둘째로는 이러한 제도적 배경 속에서 문화예술과 교육은 어느 하나가 더 우위에 설 수 없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라는 철학의 공유이다. 세 공간이 모두 맨 위의 예술감독과 교육감독은 물론, 말단 스태프까지 예술과 교육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공유를 강조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세 번째로는 그러한 예술공간의 존재는 지역사회 구성원들과의 긴밀한 참여와 소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존재 가치가 돋보인다는 인식이다. WYP나 리릭극장처럼 공통적으로 극장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소통하고 반영하는 구조는 그들의 성장에 핵심요소이다. 또한 지역 의회나 예술진흥원 등 예산을 지원하는 기관이 개별 극장의 프로그래밍이나 운영에 최대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환경도 이유가 될 것이다.
지역과 예술공간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가치의 공유
영국의 사례들에서 주목할 점은 문화예술시설이 지역사회의 '배움'과 '참여'의 장으로서 자리할 때 진정 의미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이는 정책적 결과라기보다는 지역과 예술공간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오랜 협력의 산물이다.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 서구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정책적 시도와 구조적 실험을 빛의 속도로 거듭해온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에 대해 오히려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던 영국의 행정가들이 호기심과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딱히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일찍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예술이 일상의 삶과 연계할 때 참된 의미를 지닌다는 그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어떻게 우리 예술가들과 행정가들이 함께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 거센 물살 속에 내던져진 우리에게 주어진 고민이자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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