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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

공모ㆍ기금ㆍ행사 내용
기간 2024-09-12~2024-11-24
주관 서울대학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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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24-09-22 조회수 75 작성자 스페이스바


2024년 09월 12일 - 2024년 11월 24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전관


화이트헤드가 말했듯 2,000년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덧붙여진 고만고만한 각주들에 지나지 않는다. 시각예술은 어떠했나. 리요타르에 따르면 서양미술은 고전과 현대, 신, 구대륙을 막론하고 숭고미를 추구해왔다. 인상주의자들이 잠시 보는 행위에 방점을 찍었지만, 20세기의 흐름도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슈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물(水)의 사례를 들어 즉각 그 한계를 짚어냈다. “물을 보는 것만으로는 물의 절대적인 모성, 생명의 최초의 환경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추상화가 칸딘스키는 예술의 목적이 물질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예술은 데생 기술이나 환영의 생산에 머물러선 안 되며, 해방된 영혼의 실재(fact)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피에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신조형주의 추상도 “존재 내의 보편적인 진리와 교감할 수 있는 정신적인 미술”에 이르는 걸 목적 삼았다.

가장 물(物) 자체에 경시되었던 시기에도 그 물(物)은 정신적인 것의 추구와 결부되었다. 슈퍼마켓이 신전(神殿)화 되고, 코카콜라와 캠벨 스프가 은총의 성유물로 되었을 뿐, 팝아트조차 이 계보에서 예외가 아니다. 지각과 인식의 해방을 위해 올더스 헉슬리는 메스칼린의 환각 효과에 기대야만 했다. 그 실망스러운 결과를 자신의 에세이 『인식의 문』(1953)에 기록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긴 했더라도. 1950년대 프랑스 추상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도 같은 길로 나아갔다. 에테르, 아편, 메스칼린의 힘을 빌어 꿈, 무의식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곤 했다. 이 이야기는 이후로도 길게 이어진다. 존 케이지는 적대주의의 온상인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려, ‘선불교-아방가르드’라는 다소 엉성한 텃밭을 일구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백남준은 사자(死者)의 영혼을 불러내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극한다는 샤머니즘의 길로 우회로 없이 나아갔다.

계몽과 이성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주가 얼마나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했던가?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의미 상실의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서성인다. 의미의 상실, 모든 생명체의 결코 기계적으로 규정되어선 안 될, 풍성한 의미의 상실, 그 상실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하는 것이 기나긴 추구의 출발점이었다.

《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은 그 연장선상에 열세 개의 추구를 배치함으로써, 역사적 맥락에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의 긴장을 인식하고 반추하고자 하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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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자 야콥 폰 윅스퀼(J. von Uexküll)은 그 의미를 이해할 때 비로소 주어지고 생성되는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제대로 알 수 있다. 의미가 삶을 붙들고 지식을 견인한다. 의미가 미궁에 빠지면 결국 삶을 놓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불멸의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신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쟁론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상실의 시대의 배후를 탐사하면서, 인간에 대한 조던 피터슨(Jdan B. Peterson)의 관점을 환기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저해상도로 창조된 신’이자 ‘신성은 없는 신’인 인간이 신에게서 멀어질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의미의 상실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정작 보이는 것들의 운명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보이는 것들의 전투 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전쟁이 있다. 보이는 것들의 해석과 판단도 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존한다. ‘빵’과 ‘숭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빵을 대하는 인식은 신에 대한 것의 한 접힘이다. “한 조각 빵과의 만남이 신과의 만남임을 믿음으로써, 신에 대한 유일한 경배의 시험을 통과한다.”(시몬느 베유.Simone Weil) 의미는 보이는 것들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신화경제학의 저열한 수준에서 이 관계 항이 한 번 더 목격된다. 신자유주의 주장대로 규제가 사라지자 시장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시장은 늘 존재했지만, 오늘날처럼 시장을 신으로 섬긴 적은 없었다.(하비 콕스.Harvey Cox) 모든 것을 파괴한 뒤 자신마저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고 틀의 종국은 끊임없이 등장해서 보이는 것들의 해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신들의 역사, 곧 만신전(萬神殿)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예술의 임무는 다른 현실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이 제시하는 열세 개의 관문이 누군가에게는 이 시대의 파행하는 의미 지평에 대한 반추를, 누군가에게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말하는 ‘영원한 정체성의 본향’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으로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참여작가: 권오상, 김두진, 김상돈, 김현준, 노상균, 민찬욱, 배형경, 신기운, 신미경, 안재홍, 이석주, 전성규, 최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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