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단 '로미오와 줄리엣' 중국 진출기
김혜영(국립극장 공연기획단 공연사업팀)
고비사막의 황색 모래바람이 베이징의 하늘을 뿌옇게 뒤덮은 2003년 3월 어느 날,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베이징 공연 사전답사를 위해 처음으로 중국을 찾았다. 개방의 급물살을 타고 변화하는 중국을 만나는가 싶었는데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베이징의 시내 곳곳에서는 여전히 과거 공산주의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국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베이징 시는 경제성장과 함께 문화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국제적인 행사들과 세계적인 초청공연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당초 그해 5월에 성대한 막을 올릴 예정이었던 <제1회 국제 베이징드라마 페스티벌(The 1st Beijing International Drama Festival)>도 그 일환으로 베이징 시는 이탈리아, 아일랜드, 한국, 일본, 독일, 노르웨이 등 세계 각국의 유명한 작품들을 유치하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본 행사에 유일한 뮤지컬 작품으로 초청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중국에서 서서히 그 불씨를 키워가는 ‘한류(韓流)’바람에 소용돌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첫 해외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3월 답사이후 항공권 예약이며, 화물운송 협의, 계약 등의 문제로 일의 진척을 보아가던 상황에서 뜻밖의 좌초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상초유의 ‘사스(SARS)’ 비상사태는 페스티벌 개최는 물론 서울예술단의 베이징 투어계획도 백지화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현지 기획사측으로부터 무기한 연기나 행사 취소 등의 통보도 받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연락망이 단절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전답사 때 받아온 공연단 65명의 항공료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예술단 내부적으로는 공연취소 쪽으로 중지를 모아가고 있었다. 베이징 공연에 대한 기대도 점차 사라지고 사스에 대한 공포도 한풀 꺾이고 있을 즈음 중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서울예술단의 베이징 공연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페스티벌이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으로 연기되어 재개에 들어갔으니 서울예술단도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사스의 공포가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은 상황에서 단원들을 설득하고 단체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내 첫 번째 임무였다. 사스의 위력도 단원들의 해외공연의 의지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중국 베이징 공연은 초청단체인 북경가화태양문화예술유한공사(北京歌貨太陽文化藝術有限公司)의 주관으로 1,100석 규모인 세기극원(世紀劇院)에서 총 3회 공연하는 것으로 확정되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0박 11일간의 일정으로 총 65명 규모의 공연단이 원정길에 나선 베이징 공연은 서울예술단 창단 이래 최대 규모의 해외공연이자 창작 뮤지컬로 바다를 건너게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경사였다. 사업을 확정지은 순간부터 세부조건협의, 일정조율, 투어인원 확정, 계약, 항공, 숙박 예약, 중국정부 공연허가 신청 및 승인, 화물운송(항공/해상), 단체 비자발급, 예방접종, 현지 유관기관 협조요청 등으로 분주한 두 달을 보내고, 투어매니저로서의 막대한 사명감을 등에 업고 베이징 행 비행기에 올랐다. 6개월 후 다시 찾은 베이징 시내에선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베이징 심장을 가로질러 활주로처럼 쭉 뻗은 광활한 대로변에는 즐비하게 늘어선 한국 기업들의 화려한 광고들과 부쩍 늘어난 차량들이 뿜어대는 황사보다 더한 배기가스가 공연단을 맞이했다. (사스 이후 베이징시내 승용차 판매율이 4배 이상 급증했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많은 인원들이 함께 한 해외공연인지라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빠질 수 없었다. 당시 객원무용수로 공연단과 함께한 발레리노가 리허설 도중 인대가 늘어나 공연무대에는 서보지도 못한 채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했고, 공연 바로 전 날에는 자막 수정작업을 위해 밤을 새며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중국어 자막을 편집해야 했다. 셋업을 위해 고용한 인부들이 자전거 전용도로가 막혀 늦었다며 불쌍한 모습으로 네 시간 늦게 공연장에 나타난 일 등 돌이켜보면 추억으로 남는 지난 일들이지만 당시 공연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들에게는 핏줄이 곤두서는 일생일대의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는다. 운 좋게 중국 내 ‘한류(韓流)’ 붐에 편승할 수 있었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매회 90%이상의 객석을 채우며 성공적인 해외 첫 진출의 성과를 거두었다. 공연 후 분장실을 찾아 몰려드는 중국관객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는 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우리만의 자축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중국 현지기획사들로부터 러브 콜이 쏟아졌다. 아직 뮤지컬이란 장르가 생소한 중국에서 그것도 대륙의 장사꾼이 한국의 뮤지컬이 ‘물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진데 기획사들은 저마다 저작권 판매, 공연권 대여, 중국공연 투어권 계약 등의 유혹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 이후 저마다 두드려본 계산기에서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는지 기획사들은 하나 둘 손을 들었다. 2003년 중국은 세상을 향해 자국의 문호를 완전 개방하는 정점의 시기로 자체적으로 보유한 문화 인프라 및 시스템과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국 내에서도 문화적 우위를 누리고 있는 상하이와 경쟁이라도 하듯 베이징 시는 국제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브로드웨이, 웨스트앤드, 파리 등에서 성공한 대작들을 주저 없이 불러들였다. 당시 베이징 드라마 페스티벌을 주최하고 그 오프닝 공연을 이탈리아의 오페라 ‘아이다(Aida)’로 선정한 것도 그 연장선상으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성공한 대작들이 초청공연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갖은 물량공세로 베이징을 공략했던 초대형 야외 오페라도 거대한 만리장성의 벽은 넘지 못했다. 베이징 공연 이후 몇 차례 중국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매번 중국을 방문 할 때마다 새로운 중국을 만나게 된다. 날로 외형적인 발전을 이루는 중국의 도시들을 통해서 또는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중국은 매번 새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베이징 공연을 통해 초청사에서 친구로 남게 된 현지 북경가화와의 인연은 앞으로 한국의 문화예술관계자로 중국과 함께해야 할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구상하게 만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수차례 베이징을 드나들면서도 아직까지 중국의 심장 만리장성의 입구에도 서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 벽을 넘어 정상위에 한국문화의 깃발을 꽂을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필자약력 필자 김혜영은 극단 현대극장, 서울예술단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현재는 국립극장 공연기획단에서 해외공연 및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해외공연 PD로 2003년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중국 공연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