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일기]
전화의 기술 - 고객전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대학로의 극단의 경우 기획파트에 있는 사람은 전화로 예매안내, 찾아오는 길, 주차안내 등에 대한 정보를 관객들에게 안내해야 한다. 골목골목 안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로 극장들의 특성상 약도가 있어도 관객들이 찾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공연이 진행될 때마다 예매와 오는 길에 대한 안내를 수십 번 반복하다보면 의도하지 않은 특별한 전화의 기술(?)이 생기게 된다.
에피소드-1, 상대방을 침묵하게 하는 반말의 기술 예문을 살펴보자. 보통 이 기술은 공연장으로 찾아오는 길 안내 연속 20회쯤을 넘을 때부터 발휘되며, 순간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 난처함이 도사리고 있다. A : "안녕하세요? △극단입니다." (이미 앞의 수차례 안내로 상대방의 숨소리만 들어도 길 찾는 전화임을 눈치 챈다.) B : "네, 지금 대학로인데, 공연장을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 모르겠어서요." A : "아, 네, 어디쯤이세요?" B : "여기는 마로니에 공원이에요." A : "네, 그러시면 직진해서 쭉 올라 오시구요. KFC랑 맥도날드 지나서 오시면 혜화역 1번 출구가 보여요." (점점 길안내에 몰입하여 분위기 고조된다.) B : "아, 그렇군요. 거기에서 바로 있나요?" A : "아뇨, 좀 더 골목으로 들어와야 해." 순간 둘 사이, 길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쯤 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관객에게 반말이라니. 순간적으로 혀가 꼬인 것인데, 상대방은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다. 이쯤에서 방어 기술을 생각해보자면 재빨리 뒤에 '요' 자를 붙여서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 바로 기침이나 재채기를 해서 우연인 것처럼 가장하는 방법이 있다. 시간이 흘러서 타이밍을 놓쳐버리게 되면 낭패다.
에피소드-2,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버벅거림의 필살기 예문을 먼저 살펴보자. 안내해야할 공연의 제목은 "달려라 달려 달달달"이라고 가정해보자. 벌써 제목의 길이에서 포스가 느껴진다. 하지만 안내에 있어서 제목 앞에서의 물러섬이나 주춤거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A : "안녕하세요? △극단입니다." (여기까지는 또 아주 좋다.) B : "네, △극단이죠? 그 제목이 뭐죠? 무슨 달려라…." A : "아, 네, 달려라 달려 달달달 말씀하시는군요?" (한고비 넘긴다.) B : "예~ 맞아요. 그거 예약 좀 하려고요. 할인되는 게 뭐가 있죠? 근데, 제목이 뭐라고 그러셨죠? 다시 한 번만." 이렇게 관객이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을 묻는 순간, 두 번째 고비가 찾아온다. 잠시 생각이 멈추고 평소대로라면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이미 대답을 했을 법한 시간이 지나면서 황급히 공연 제목을 먼저 꺼낸다. A : "네. 공연 제목은 달려라 달려 @#$!!%. 아니, 달려라…!$#!@#%&…." 발음이 어려워 여러 번 반복하면 더 심한 외계어로 변모되고 만다. 이쯤해서 성격이 좋은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리고, 참지 못한 상대방은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 기술사용 후에는 얼굴도 보지 못한 상대에 대해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부작용이 있다. 통화를 끊고 나서도 후유증은 몇 분간 지속되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자책감으로 공연제목을 계속 입으로 되뇌게 된다. 전화기 앞에서 계속 ‘달려라 달려 달달달… 달려라 달려…달달달’이라고 주문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동료는 뭔가 심각한 조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도 걸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지나간다. 사실, 그냥 말 한번 꼬였을 뿐이다. 글 : 꿈쟁이(11dreamer11@naver.com) 익명을 요구한 필자는 대학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고, 현재 2년차 공연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 알프(holy@alph.pe.kr) 본명은 김남석. 소싯적 공연과 축제를 만드는 일에 필이 팍(!) 꽂힌 적이 있었으나, 생계유지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조기 전업하였다. 지금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으나 생계유지는 소싯적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다. 천운과 감각 하나만 믿고 사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