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스토밍] 기획자의 감성을 깨우는 문화 코드
일과 놀이의 경계에서 신나게 수다 한 판 스프링 웨이브 페스티벌 김성희 예술감독
일하다 문득 비는 시간에 어떤 취미생활을 하는지, 하루하루 분주한 생활 속에서 나를 상큼하게 재충전시켜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귀찮다거나, 아니면 시답잖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말 질문한 사람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 별다른 꺼리가 없다. 그저 가끔씩 머리를 자르러 가거나 쇼핑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하는 것일 테니. 내가 기획하는 작품이나 축제를 본 후에 날 만나는 사람들은 약간의 오해 내지는 기대감을 갖는 것 같다. 워낙 난해(!)한 작품을 고르는 걸 보면, 주변 장르인 음악이나 미술, 아니면 책이나 인문학에 조예가 깊을 것 같다는 류의. 나를 한번 만난 사람이라면 그 기대가 판타지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테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독서를 별로 안한다. 그다지 체질에 맞는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으로 무장되었을 리 없다. 음악이나 시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야 어린 시절부터 내 뜻과는 무관하게 무용수로서의 삶을 살았으니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일 테고, 그렇다고 비범한 식견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내 본분이라 할 수 있는 공연 역시도, 나의 편협한 취향과 얇은 귀에 들어오는 작품만 보는 정도라, 아무도 몰라주지만 나만은 알아보는 숨은 진주를 찾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럼, 특별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 타입의 기획자도 아니고, 해박한 식견과 지식을 자랑하는 학구파도 아니며, 그렇다고 얌전히 앉아 열 번이고 백번이고 기획서를 발전시켜보겠다는 성실파도 아닌 내가, 기획자로서 그래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원천이 뭘까. 난 매일매일 뭘 하고 있지?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깨달은 것,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수다. 그게 내 사고와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은 딱 세 그룹으로 정리할 수 있으니, 인간관계가 넓다고는 결코 우길 수 없겠다. 한 그룹은 나이 지긋하신 예술계 어르신들이다. 노땅들하고 어울리는 게 어째 어색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분들의 오랜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통찰력은 늘 나를 멈칫하게 만든다. 호불호가 너무 뚜렷해 편견이 심한 나에게 그분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시선을 공정하게 만들어주고, 수다 떨면서 내뱉는 산만한 나의 생각들을 교통정리 해주시기곤 한다. 그 중에서도 (쿤스텐 페스티벌 디렉터인) 프리 라이젠(Frie Lysen)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획자이기도 하고, 큰 스승이기도 하고, 동반자기도 하다. 그녀와의 수다를 통해서 일에 대한 자세, 나아가 삶에 대한 자세에 대해 많이 배운다. 가끔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이 생기거나 길을 잃을 때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고, 더 나아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행복감을 찾게 한다. 두 번째 그룹은 지금 나와 같이 일하는 후배들. 대표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후배들은 내게 있어 부하직원이라기 보다는 동료다. 뒤늦게 혼자서 깨우쳐야했던 것을 조금이라도 미리 가르쳐주고 싶고, 그 친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기능적인 일이 아니라, 왜 그 일이 필요한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들과 이러저러한 내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이러한 수다를 통해 젊은 친구들의 반짝이는 감각과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모다페’라는 썩 괜찮은 네이밍 역시 이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나의 친구들이다. 무용, 음악, 미술, 건축, 디자인, 비평,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지내며, 그들의 삶과 작업을 쫒아 다니다 보니 어느덧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덤으로 얻었다. 그 친구들과의 수다를 통해 새로운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부족한 나의 지식을 충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수다를 떨다가 갑작스럽게 ‘일’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것들이 바로 내 기획 영역을 무한으로 확장시키고 더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모든 수다의 대상이 다시 일과 연관되어있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난 일과 사생활이 잘 분리되지 않는 사람이다. 나만의 은밀한 사생활, 은밀한 세계를 지키기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수다 속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어느 순간 슬쩍 일의 세계로 넘어오는 식이다. 우리 일이라는 게 워낙 그런 모호한 경계 지점에 있다는 것, 잘 알지 않는가. 문제는 이 모호한 경계의 직업을 얼마나 신나게 즐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장도 여행처럼, 기획도 놀이처럼, 축제는 파티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일도 생활도 그렇게 꾸려나가는 것이 나를 늘 깨어있게 만드는 브레인스토밍의 핵심이다. 그리고 내게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과 떠는 이따금 포커스도 빗나가고, 뒷걸음치다 쥐를 잡기도 하고, 뜬구름을 잡기도하는 행복하고 신나는 수다.
필자약력 김성희는 처음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전공, 무용가로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95년 뉴욕대학(NYU)에서 예술경영학을 전공하였다. 2002년부터 2005까지 모다페(Internationl Modern Dance Festival, Seoul)의 디렉터로 활동하였으며, 2007년에는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Spring Wave Festival)을 발족하여 공동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안은미 컴퍼니, 얀 파브르(Jan Fabre), 레이몬드 호게(Raimund Hoghe) 등 국내 및 해외 작품 제작에도 참여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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